인간은 미래에 더 큰 희망을 걸지 않게 되었을 때 자신의 처지에 만족한다고 답한다. 일본 젊은이들은 고도 성장기의 버블이 다 꺼진 지금, 미래에 대한 희망이 별로 없기 때문에 현실에 만족하고 있다는 얘기다. 결국 일본이든 우리든 지난 시대의 기준을 들이댄 '세대론'으로 현재를 완벽하게 설명하려 드는 건 어리석다.
데이의 <세 황금문>이다. 누구나 말하기 전에 세 문을 거쳐야 한다. '그것이 참말인가?', '그것이 필요한 말인가?', '그것이 친절한 말인가?'
희망에 눈이 먼 개미끼리 폭탄을 돌리고 있다. 당신께만 특별히 알려주는 고급 정보라며 속삭이는 귓속말에 일개미들은 나비가 되어 비상할 것을 꿈꾸며 눈이 먼다. 하지만 누군가가 나에게 한사코 권하는 것은 그 누군가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고, 나에게 이익이 되는 일은 남들이 한사코 감추고 있는 게 세상의 비정한 이치다.
팔짱 낀 채 '한계', '본질', '구조적인 문제' 운운 거창한 얘기만 하며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아무나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진짜 용감한 자는 자기 한계 안에서 현상이라도 일부 바꾸기 위해 자그마한 시도라도 해보는 사람이다.
한 개인으로 자기 삶을 행복하게 사는 것만도 전쟁같이 힘든 세상이다. 학교에서 살아남기 위해, 결혼식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취업 관문에서 살아남기 위해,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하며 아이를 키우는 고통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 아이가 다시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도록 지키기 위해. 그런 개인들이 서로를 보듬어주고 배려해주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또 그렇기에 얼마나 귀한 일인가.
우리 하나하나는 이 험한 세상에서 자기 아이를 지킬 수 있을만큼 강하지 못하다. 우리는 서로의 아이를 지켜주어야 한다. 내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개인의 행복을 위한 도구인 집단이 거꾸로 개인의 행복의 잣대가 되어버리는 순간, 집단이라는 리바이어던은 바다괴물로 돌아가 개인ㅇ르 삼킨다. 집단 내에서의 서열, 타인과의 비교가 행복의 기준인 사회에서는 개인은 분수를 지킬 줄 아는 노예가 되어야 비로소 행복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사다리 위로 한캉이라도 더 올라가려고 아등바등 매달려 있다가 때가 되면 무덤으로 떨어질 뿐이다. 행복의 주어가 잘못 쓰여 있는 사회의 비극이다.
물론 노력은 소중하고 필요한 것이지만 맹목적인 노력만이 가치의 척도는 아니다. 무엇을 위해 노력하는지 성찰이 먼저 필요하고, 노력이 정당하게 보상받지 못하는 구조에 대한 분노도 필요하다. 가장 위험하고도 어리석은 건 '노력해야 성공한다'를 넘어서 '성공한 이들은 다 처절하게 노력했기에 그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만큼 노력하여 성공한 이들이니까 괴팍하고 못되게 굴 만하다', '강한 것은 아름답다' 등으로 끊임없이 가지를 치는 스톡홀름증후군이다.
가성비 좋은 행복 전략이라는 관점으로 생각하면 직업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집착할 필요도 없다. 우선 자기 힘으로 생존하는 것이 생명체의 기본 사명이므로 냉정하게 현실적으로 자기가 선택가능한 직업 중 최선을 선택하여 생계를 유지하되, 직업은 직업일 뿐 자신의 전부를 규정하는 것은 아니므로 취미 활동, 봉사, 사회 참여 등 다양한 행복 활동을 병행할 수 있는 것이다.이런 식으로 위험ㅇ르 분산하면 행복할 기회가 늘어나고 소소한 행복의 플랜B, 플랜C를 계속 만들어나갈 수 있다.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과학에 따라.
만구의 개인주의자들이여, 싫은 건 싫다고 말하라. 그대들이 잃을 것은 무난한 사람이라는 평판이지만, 얻을 것은 자유와 행복이다. 똥개들이 짖어대도 기차는 간다.